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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성(城)’과 ‘소송’ - 신을 찾아야 하는 인간
1.들어가는 말
‘성’과 ‘소송’은 모두 카프카의 미완성작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미완성작이 발표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과 관련된 서류를 모두 소각해 달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그의 미완성 작품과 일기와 편지 등을 출판했다. 독자인 우리의 입장에서야 반가운 일이지만 카프카의 입장에서라면 어떨까? 미완성 작품이 발표되지 않고 유언대로 파기되었다면 그 작품들은 영원히 카프카 자신만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것이 되었고 우리는 그의 편지와 일기를 통해 사생활과 심리상태를 분석하려든다. 죽은 카프카는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이 주인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주인도 아니다. 슬픈 일이다. 이런 점에서 카프카가 남겨준 작품을 논하기에 앞서서 카프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2. ‘성’과 ‘최고법원’의 의미
‘성’과 ‘소송’ 이 두 작품에 나오는 성과 최고법원의 의미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1) 실체 없는 억압체제
성은 어떤 절대 권력이나 강력한 관료제에 대한 상징이다. ’소송‘의 최고법원이 상징하는 것도 역시 비슷하다. ‘성’의 주인공 K는 성의 측량기사로 왔다고 하지만 막상 성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끊임없이 성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해보지만 결국 실패한다. ’소송’에서도 같은 이름의 주인공 K가 자신을 기소한 최고법원의 실체를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은 매우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 이르게 한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파멸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 작품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은 그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그 구조 속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즉,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일단 그 현실을 인정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려 하는 것이다. 다른 작품인 ’변신‘도 비슷한 구조를 이룬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다. 매우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레고르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접어두고 ‘이제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기반으로 인정한 후 그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성 아래의 마을을 떠나버리거나 기소상태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계속 애쓴다. 작품은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보여주며 전개된다. 그러나 역시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파멸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파멸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주인공들이 놓인 질서 자체가 이미 허위이고 모순이기 때문이다. 측량기사로 고용되었음에도 자신을 고용한 성에도 다가갈 수 없는 상황 자체가 모순이다. 기소당하는 이유도 없이 기소당하는 상황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그 상황 자체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파국은 결정되어 있다. 그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질서 안에서 아무리 해결책을 찾으려 해봐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스스로 벌레가 된 것에 아무 의문도 품지 않는 이상 이미 결론은 파국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유일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그 상황 자체를 전복해야 하는 것이다.
2) 신
실체가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분명 주인공에게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성이나 최고법원의 존재는 신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K가 성을 향해 다가가려는 노력은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내용은 결국 절대적인 어떤 것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K의 직업이 측량기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신을 측량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소송‘의 최고법정도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자신을 기소한 최고법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것 역시 신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최고법정이라는 것이 K에게 한 일이 무엇이던가? K를 기소한 것이다. 죄 준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원죄의식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성’이나 ‘소송’에서 K는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끈을 찾는다. 즉 그 실체와 자신을 연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 사람들은 권력체계나 관료제의 중간 권력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성직자다. 또는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현실적인 권력을 다지는 사람들이다.
그럼 이제 성과 최고법원을 신으로 해석하는 관점에서 주인공이 파멸하는 원인을 찾아보자. 신이라는 존재는 확연히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 우리를 규제한다. ‘성’에서는 성에 예속된 마을에서 보듯 사람들은 성의 명령에 복종하고 성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아말리아네 가족 같은 경우는 마치 파문당한 것처럼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다. ‘소송’ 에서는 우리에게 별 이유도 없이 원죄를 주어 기소해놓고 참회를 요구한다. 이러한 억압적인 상황에서 주인공, 즉 우리들은 신과 대면하고 싶어 한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억압을 주는 신이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이며 실체가 있다면 왜 우리를 이렇게 억압하는지 묻고 싶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궁금한데 가장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신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실체를 찾는데 실패하고 파멸한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고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된다.
먼저 신이란 존재의 구체적인 실체는 근본적으로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해석이 있을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무형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이므로 주인공처럼 그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 접근하려는 것은 아예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아마 이런 입장일 것이다. 성과 최고법원은 존재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 뿐 실질적으로 주인공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주인공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주인공이 해야 할 행동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은 구체적으로 확인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런 신의 존재양식을 모르고 구체적으로 신에 접근하려는 주인공이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이는 신을 시험하고 모독하는 행위일 수 있다.
반면 신이라는 것 자체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 무신론자의 결론일 것이다. 성이나 최고법원 모두 그 실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나 조직은 드러나지 않고 있고 다만 그 조직의 하부조직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중심조직과 끈을 연결할 수 있다는 사람들만 등장한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성이나 최고법원은 그러한 중간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장치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게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해서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이런 관점으로 성과 최고법원과 신의 관련성을 해석하고 싶다.
위의 두 관점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간의 끝없는 논쟁거리이다. ‘신은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과 ‘증명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의 대립은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될 논쟁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관점에서라면 신의 실체를 증명하려고 따지고 들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다. 어떤 결정이나 처사든 신의 뜻에 따르는 길이 구원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다. 두 번째 관점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신을 통해 제시되는 삶의 문법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이다. 일단 신의 실체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신을 찾는 노력은 중요하다. 그 결과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위이다. 그런데 그 허위가 실질적으로 어떤 구속력을 발휘하며 영향력을 끼친다면 그 구조자체를 거부하고 전복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3. 신을 찾는 인간, 찾아야 하는 인간
인간은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고 두렵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종교이다. 종교를 믿어 죽은 이후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는 점점 더 정교해졌고 단순히 인간의 죽음에 대한 위안책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을 지니게 되었고 인간은 그것을 이용해서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남에게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논리와 현실을 초월한 절대적인 것의 입을 빌면 효과적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는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본래 약자의 종교였던 기독교도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으며 박해받는 종교에서 국교로 탈바꿈하며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표도르비치가 제기했듯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수를 시험한 악마의 제안 중 하나인 ‘네가 나에게 절을 한다면 만국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라는 제의를 받아들인 셈이 된 것이다. 교회는 현실권력과 타협하고 교황으로 대표되는 교회세력이 세속의 황제권과 맞서며 중세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듯 정신적인 혹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그런데 카프카에 나오는 주인공은 신을 검증하기 위해 찾는다. 믿는 것은 아주 행복하고 쉽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다. 의심하려면 쉽지 않다. 이것저것 생각해야하고 따져야 한다. 그러나 믿어버리면 편안해진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절대적이고 완벽하다는 신을 믿는다면 세상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어 버린다. 모든 것이 다 신의 뜻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두렵고 쓸쓸하더라도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한 채 끊임없이 신을 의심하고 또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해서 판단하려 한다면 그것이 더 보람찬 삶일 것이다. 신을 찾는 과정은 그런 고민의 과정이며 실패가 예정된 과정이기는 하지만 보람된 과정이다. 만일 정말 신이 있다면 신을 찾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세상에 홀로 선다고 해도 대견스럽게 봐줄 것이다. 내가 신이라면 나의 피조물의 그런 노력을 인정해줄 것이다. 만일 기독교의 신처럼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히 지옥에 보내 고통을 주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것은 신이 아니라 차라리 악마이다.
4. 맺음말
카프카의 작품에서 신을 찾는 인간은 실패했다. 지금은 카프카의 20세기를 지나 21세기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과연 신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하는 지 의문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지도 한 세기가 지났으니 신의 유골도 다 썩어버려 찾기 힘든 시대이다. 그러나 사실 지금은 중세암흑기에 비견될만한 광신의 시대이다. 새로운 신이 등장했다. 적어도 예전의 신은 사랑과 평등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지금 우리가 믿는 신은 오로지 돈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바른 일이다. 물신주의 교리는 ‘꼭 이것을 사야 한다, 이것을 사지 못하면 불행해진다’고 인간들에게 주술을 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 새로운 신을 찾아야 한다. 과연 그 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옳은지 그른지 따져야 한다. 또한 그 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탐구해야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 자본의 논리라는 것이 마치 성과 최고법원의 중간자들 같은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처럼 패배하면 안 된다. 이미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이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20세기의 카프카 소설에 나온 인물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삶이라는 소설을 승리로 끝내야 한다.
카프카의 유언이 묵살되면서까지 우리에게 그의 소설이 전해졌다. 카프카의 소설이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을 바꾸고 우리를 각성시키는 지침서가 될 수 있다면 카프카에게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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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와 모순의 지반 위에선 결코 그것들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게, 정세가 어수선한 요즘 참 와닿네.
오 그러게!
근데 "삶이라는 소설을 승리로 끝내야 한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어 호호
카프카 소설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삶을 소설에 비유한것..뭐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닌듯...
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허위와 모순의 지반 위에선 결코 그것들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게, 정세가 어수선한 요즘 참 와닿네.
카프카 소설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삶을 소설에 비유한것..뭐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