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월 17일 (사직) 관중수 : 26,996명
05월 17일 (문학) 관중수 : 24,467명
05월 17일 (잠실) 관중수 : 29,219명
05월 17일 (광주) 관중수 : 13,400명 (매진)
야구의 부흥기가 찾아온 것인가? 요즘 분위기를 보면 확실히 그런 듯 하다.
5/17일 각팀별 관중현황
| 순위 | 팀명 | 누적관중 | 경기수 | 평균관중 |
|---|---|---|---|---|
| 1 | 롯데 | 483384 | 21 | 23018 |
| 2 | LG | 306712 | 24 | 12779 |
| 3 | 두산 | 289318 | 18 | 16073 |
| 4 | SK | 261763 | 21 | 12464 |
| 5 | 삼성 | 136762 | 22 | 6216 |
| 6 | 한화 | 119635 | 23 | 5201 |
| 7 | KIA | 114549 | 18 | 6363 |
| 8 | 우리 | 94264 | 18 | 5236 |
총 145경기를 치른 12일 통계로 155만588명이 야구장을 찾았다.
지난해보다 22%가 늘었다. 이렇듯 야구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프로야구 흥행을 통해 본 스포츠와 군중심리'라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거창해 보이지만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야구를 전도하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한 글인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
(1)야구의 몰락
95년 총관중은 500만이 넘어 야구인기가 절정이었다.
그러나 프로야구는 90년대 말부터 온갖 악재를 만나 관중이 급감한다.
1)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파탄
이 사건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2) 박찬호 메이저리그 진출, 선동렬, 이종범 일본 진출
그동안 프로야구의 최고 스타는 곧 야구계 최고 스타였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등 우리보다 야구를 잘한다는 곳에 선수들이 진출하자 사람들이 보는 눈이 높아졌다. 일단 투수가 던지는 공의 속도가 달랐고 경기장의 모습이 달랐다. 그러자 프로야구에 대한 동경과 존경심이 사라져버렸다. 프로야구 홈런왕이라도 해도 한국에서나 홈런왕이지 메이져리그 가면 홈런 10개나 칠 수 있을까 하는 비야냥을 듣게 되었다.

3) 한국영화 흥행
90년대 말과 2000년 초부터 그동안 헐리웃 영화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던 한국 영화가 폭발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옛날 같으면 친구끼리 야구장에 갔을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다니게 된다.
4) 월드컵
2002 월드컵 4강은 축구 이외의 스포츠에 투자하는 것이 헛일이라는 논리를 넓게 전파했다.
게다가 월드컵 때문에 무리하게 지었던 축구전용구장에 투자한 비용을 아직도 회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스포츠 토토에서 야구관련 상품에 베팅해도 그 수익금이 축구전용구장에 투입했던 비용을 보전하는 데 쓰인다. 아직도 50~60년대에 지은 허름한 야구장에서 경기를 봐야 하는 야구팬들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일이다.
축구를 못하면 큰일이라도 날듯 난리를 떨고 뻘건 옷 입고 모여서 축구응원하는 것이 애국자라고 조장하는 사회분위기가 가득했다. 외부자의 눈에서 본다면 매우 섬뜩하게 느껴졌을 때였다.
2002년 프로야구는 힘든 날을 보냈다.
하지만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한국시리즈에서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명승부가 펼쳐졌다. 물론 LG팬인 나에게는 괴로운 한국시리즈였지만 그 뜨거운 한국시리즈가 있었기에 야구는 월드컵이라는 악재를 딛고 내년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한국시리즈 내내 1할대로 부진하던 이승엽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LG의 철벽 마무리 이상훈에게 동점 쓰리런홈런을 치고 바로 다음에 나온 마해영이 끝내기 홈런을 쳐서 삼성이 우승했던 것이다.
5) 비인기 팀의 우승
지금은 없어진 현대는 프로야구에서 애증의 존재이다.
대기업 현대는 프로야구에 참가하고 싶었으나 기존의 팀들이 텃세를 부려 가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대 피닉스라는 아마 팀을 만들어서 엄청난 돈을 뿌리며 유망주들을 싹쓸이 했다.
아예 현대는 프로야구의 틀을 깬 새로운 야구 리그를 만드려고 했던 것이다.
마치 미국의 메이져리그가 아메리카 리그와 내셔널 리그로 갈라져 있듯 말이다.
그러나 현대는 결국 태평양을 인수하여 프로야구판에 뛰어들게 된다. 인수비용은 무려 470억원.
당시가 95년이었으니 대단한 액수이다.
올해 현대가 우리담배에 230억원에 팔린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대단한 액수이다.
한마디로 현대는 야구에 미쳤던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몽헌 회장이 야구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건 정주영 회장은 야구를 싫어했다고 한다. 도루를 하는 스포츠라서 비겁하다나?
여튼 현대는 과감히 투자해서 놀라운 성적을 냈기 때문에 인천팬들에게 많이 인기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야구판에 등장한 새로운 큰손이 되어 시장을 키웠다.
그러나 현대는 98년 우승을 하자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려고 했다.
애당초 인천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인천팬은 버려졌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면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서울에 자리잡은 LG와 두산의 반대,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외환위기로
현대는 서울 입성 조건으로 협상된 50억이 없어서 일단 수원으로 가게 된다.
수원은 프로축구의 자존심 수원 삼성이 있는 곳이며 삼성전자가 있는 삼성도시이다.
더구나 서울로 가는 길에 잠깐 들린 현대를 좋아할 사람이 많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인기없고 팬이 없는 현대가 2000년 2003년 2004년 계속 우승했다.
인기팀인 롯데,LG,기아는 계속 부진을 거듭했다. 이런 상황에서 관중이 많을 수가 없었다.
현대시절부터 뛰었고 지금도 우리히어로즈에 있는 외국인선수 브룸바는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이렇게 잘하는데 왜 관중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다음 회에 계속..)
《칠드런 오브 맨》
NeoPool
세상에서 가장 어린 소년 리카르도의 죽음. 까페에서 이 소식을 TV로 접하며 이를 슬퍼하는 사람들의 얼굴. 우리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울하고 절망으로 가득찬,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세계 속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2027년 11월 16일의 런던. 현재 인류는 불임 중. 말 그대로 그 누구도 아이를 갖게 되지 못하게 된지 벌써 18년째 이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불임을 겪고 있는 인류가 문명의 종말을 절망 속에서 준비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세계는 자멸해가는 중이며 전 지구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다. 그 와중에 영국 정부는 힘과 폭력으로 자신들의 땅으로 피신 온 이민자들을 몰아내가며 불안한 사회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
미래를 다룬 SF영화가 흔히 그래왔듯이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이른바 ‘공포의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흥미롭게도 작위적인 미래적 공포의 연출에 많은 품을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가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의 시대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종합한 것이거나 극적인 연출로 이를 극대화시킨 것일 뿐이다. 그래서 더 무섭고 공포스럽다. 어떤 면에서는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구현한 2027년 영국의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 내지는 은유인 것이다.
주인공 테오(Theo) 일행이 탄 버스가 최종목적지인 벡스힐(Bexhill) 난민캠프로 들어가기 전 지나치게 되는 수용소의 풍경은 반사적으로 관타나모 수용소와 아부 그라이브 감옥을 떠올리게 한다. 널리 알려진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고문 사진들, 그 중에서도 악명 높은 '후드를 씌운 남자'가 사진에서의 모습 그대로 두 팔을 벌린 채 잠시 스쳐 지나간다. 이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곡은 'The Libertines’라는 그룹의 ‘Arbeit Macht Frei’라는 곡인데, 이 제목은 바로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의 그로테스크한 독일식 유머, ‘일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서 따온 것이다. 난민으로 가장한 테오가 시계를 빼앗기는 장면이나 벡스힐 난민 캠프 입구 주변 수북히 쌓인 난민들의 짐 무더기를 보여주는 것은 프리모 레비가 묘사한 강제수용소의 풍경을 보는 듯 하다.
벡스힐 난민캠프 내에서 발생한 봉기, 그 시위대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다. 아랍어로 쓰여진 피켓을 들고 죽은 투사의 시체를 앞세운, 녹색 머리띠를 한, 성난 사람들의 긴 행렬을 보고 있자면 팔레스타인의 인티파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국기를 휘날리며 잰걸음으로 시가를 누비는 저항세력은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상기시킨다.
2027년 런던의 디스토피아가 우리의 현실, 혹은 과거의 조합임은 다른 예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 카메라가 테오와 재스퍼(Jasper)가 함께 탄 자동차를 멀리서 잡아내는 동안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불타고 있는 소들의 시체더미이다. 2003년 광우병 파동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영화 중반부 테오 일행이 피쉬당(Fishes) 일당으로부터 재스퍼의 안전가옥으로 달아나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저 멀리 공장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매연과 바로 앞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누런 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우리가 잊고 사는 ‘불편한 진실’, 환경오염에 대한 묵시록적 경고로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테오가 탄 열차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성난 군중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프랑스 방리유의 알제리 청년들일 수 있겠고, 여러번 등장하는 철장 속 불법이민자들의 모습은 한국정부의 ‘불법체류자 집중단속기간’에 걸려 여수 이주노동자보호소에 갇혔던 이주노동자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친다. 조금더 비약하자면, 피쉬당으로부터 납치를 당했다가 풀려나온 테오의 뒤로 보이는 ‘의심스러운가요? 신고하세요.’ 글귀는 지하철에 붙은 국정원 홍보스티커와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하고, 테오가 일하는 건물에 설치된 최첨단 검문검색기나 길 위 어디에든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911테러 이후의 국제공항들을 떠올리게 한다.
디스토피아의 성실한 스크린적 구현은 21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의 토대로 완성된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 구현이 표피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문명 전반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 혹은 그 ‘불임성’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자신의 리뷰1)에서 주지한 것처럼 이 영화는 인류의 ‘불임’을 생물학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 불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인 메타포일 뿐, 그 ‘불임성’으로부터 비롯된 미래 없음, 절망은 이미 우리 시대에, 우리 곁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또한 슬라보예 지젝은 이 영화를 ‘역사가 부재하는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이념적 절망에 대한 최고의 진단’2)으로 보았다. 우리는 영화 속 재스퍼와의 대화 중 테오의 중얼거림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잘 깨달을 수 있다. ‘이미 불임이 오기 전부터 세상은 망가져 있었다구요.’
영화의 디스토피아가 사실은 현재 세계에 대한 극단적 표현이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실은 절망적인 디스토피아를 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절망 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전직 운동가 출신의 현직 공무원 ‘테오’가 옛 연인이자 불법이민자들을 위해 반정부투쟁을 벌이는 피쉬당의 리더인 줄리언(Julian)의 부탁을 받고 18년만에 처음으로 임신하게 된 여자아이 키(Kee)를 휴먼프로젝트, 세계의 회복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일종의 두뇌집단에게 안전하게 인도하는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불임의 끝, 임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영화는 이미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키가 의미하는 바는 희망의 가능성일 뿐이다. 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피쉬당원들의 음모나, 현상금에 눈이 먼 시드의 배신 등은 희망이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키를 휴먼프로젝트로 데려다줄 보트 'Tomorrow'호를 등장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기대를 품게도 하지만 우리는 키의 운명이, 그리고 2027년 인류의 문명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절정에 해당하는 건물 전투 장면에서 우리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옥도처럼 펼쳐지는 시가전의 풍경 속에서 카메라는 주인공 테오의 뒤를 따른다. 귀를 매섭게 때리는 총탄소리와 폭탄소리 속에서 우리는 가냘프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인도되게 된다. 그것이 다름아닌 희망의 울림이다. 테오뿐만 아니라 건물 안에 숨어있던 난민들 또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희망의 울림이 건물안에 퍼지고 총탄이 날아드는 전장의 살벌함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엄폐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의 증거를 확인하고픈 사람들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는 쪽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테오가 결국 키와 그녀의 아기를 구출하게 되고 사람들은 아기를, 그 작은 희망을 결국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날아드는 총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기에게 다가온다. 테오와 키 그리고 아기가 지나가는 옆으로 어떤 사람은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의 위협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전 세계의 각 지역에서 온 그들은 각자의 언어가 담을 수 있는 최대의 호의와 사랑을 담아 아기를 축복하고, 잊혀진 노래들을 기억할 만큼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장가를 불러주며 아기를 달랜다. 인종과 출신을 가릴 것 없이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된 눈빛들. 아기를 도와주려는 그 몸짓들. 아기를 보호하려는 그 손길들.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고 기쁨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계단을 내려가다 맞닥뜨리는 반란군, 그들을 뒤쫓던 정부군 할 것 없이 아기를 맞이하는 동안에는 전투를 중지한다. 심지어는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 병사도 있다.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것을 압도하는, 놀랍고 경이롭기만 한 이 롱테이크 씬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희망을 꿈꿀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전제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을 설명해 내는 것은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존 레논의 'Bring on the Lucie(Freda People)의 전주가 들려오 는 시점에서 우리는 희망의 울림이 어떤 소리로 우리의 귀에 들릴 수 있는가를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폐교에서 미리엄이 언급했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이 작품이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나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처럼 SF장르의 고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든 희망의 울림에 공감하고 싶은 사람에게 나는 자신있게 이 영화를 권할 것이다.
1) 슬라보예 지젝, “THE CLASH OF CIVILIZATIONS AT THE END OF HISTORY”, 2008.04.27. <http://www.childrenofmen.net/slavoj.html>
2) 슬라보예 지젝, 앞의 문서, 2008.04.27. <http://www.childrenofmen.net/slavoj.html>,
ibuti, "인류를 향한 알폰소 쿠아론의 물음, <칠드런 오브 맨>", 2008.04.27.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3002001&article_id=46224>에서 재인용
내가 '인간과 사물의 기원' 이라는 책을 만날 확률은 얼마였을까?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
과학적인 국제기준이 없어서 잘 모르긴 해도 광우병에 걸릴 확률보다도 확실히 낮았다.
하지만 어쨌든 '인간과 사물의 기원'과 내가 만난 사실이 있고 난 후에는
그 확률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늘도 누군가는 불행하게 벼락에 맞아 죽는다.
내가 내일 그런 일을 당할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일단 그 일이 나에게 닥친 후에는 그 일은 내게 매우 중대한 일인 것이다.
--------------------------------------------------------------
어쨌든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인간과 사물의 기원'을 만났다.
잡다한 분야를 수박 겉핥기하듯 후루룩 읽던 때였는데
휙 지나가다가 인류학 분야에 '인간과 사물의 기원'이라는 멋져 보이는 책이 있길래 빌려왔다.
나는 그 책을 한참 읽으며 혼란에 빠졌고 결국 이것은 소설이라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각지의 도서관을 검색해봐도 이 책은 '문학'이 아니라
인류학이나 사회학, 철학같은 엄한 분야에 배치되어 있다.
이 책이 뻔뻔하게 인류학 서가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의자와 개가 서로를 질투했다든가, 비행기는 염력으로 뜬다든가 하는 내용이 실린 책이
단지 뻔뻔한 제목과 그럴듯한 작가이름(장 그노스)만으로 인류학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다니 말이다.
우리 생활도서관에나 제대로 '문학' '소설'로 분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현문고는 원래는 인문학에 이 책을 꽂아두었다가 나중에는 열린책들 문학전집 속에 배치했다.
매우 탁월한 혜안이며 아마 서현문고 관계자가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소설은 허구를 사실처럼 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야기는 물론이요 책 자체가 허구와 사실을 넘나든다.
작가의 정체 역시 허구와 사실을 넘나든다.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는 물론이요
책을 구성하고 있는 틀 역시 파격적인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했다.
이 책 존재 자체가 새로운 작품이요 틀이다. 문제작이다.
그런데 이 책은 얼마나 팔렸을까?
나는 선물로 이 책을 친구, 선배, 선생님등에게 주려고 6~7권은 팔아준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제대로 간파하고 분류한 서현문고에서 샀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뭐 이런 책이 있어? 이거 무슨 소리야? 정도의 반응.
조금만 더 자리잡고 읽어나가면 될텐데 그 생소함과 황당함을 견디지 못한다.
연애이야기나 역사소설 같은 것도 물론 좋지만
이렇게 완전히 소설을 틀을 깨부수고 나온 새로운 소설이 아직도 인류학이니 인문학이니 사회학 서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런 황당한 상황 자체가 이 책과 어울리는 상황이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며 조금은 지긋이 썩소를 짓게 된다.
왜냐면 내가 쓰는 이야기들도 이 책의 이야기들과 너무나 비슷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 사람과 사람의 교감! 人터넷의 첫 시작! 댓글을 달아주세요! :::
ㅋㅋㅋㅋㅋ
아 좋았겠다!